<8> 도로공사의 책임자에서 한인들의 페치카로

문영숙의 꼭 알아야 할 항일독립운동가 최재형
<8> 도로공사의 책임자에서 한인들의 페치카로
-문영숙 이사장
  • 입력 : 2021. 09.12(일) 21:24
  • 가금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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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영숙 독립운동가최재형기념사업회 이사장
[문영숙의 꼭 알아야 할 항일독립운덩가 최재형/CTN] 1884년 연해주 당국은 군인들이 상주하게 되면서 도로의 정비가 시급했다.

러시아 당국은 군대의 주둔을 계기로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라즈돌리노예- 자나드롭카-슬라비얀카- 노보키예프스키-크라스노예를 거쳐 두만강 조. 러 국경까지 군사도로 공사를 시작했다.

한인들은 대부분 도로공사장에서 노동을 했고, 아이들 중에는 골프장에서 러시아 인들의 캐디로 일을 하기도 했다.

도로공사에서 인부들이 쓰는 연장은 삽, 곡괭이, 들것 등 매우 열악한 것들이었기 때문에, 노동자들에게는 아주 힘든 중노동이었다.

통역을 맡고 있는 조선 출신 통사들은 조선인 노동자들의 입장을 대변하기 보다는, 자신들의 부를 축적하는데 급급했다고 한다. 박환교수 저<시베리아 한인민족운동의 대부 최재형>에 인용된 <아령실기>에는 이러한 통사들의 행동이 잘 나타나 있다.

-(통사)는 러시아어를 아는 사람의 칭호인데 그 종류의 구별이 적지 않다. 화차나 윤선이나 그나마 어떠한 노동장이든지, 그들의 폐단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어느 방면으로 보든지 자기 동포에게 이익을 준 것이 10 이라면, 자기 동포에게 해를 끼친 경우는 100에 이른다고 할 수 있다.

그들이 배운 것은 러시아 어 뿐, 본 것은 러시아 풍속뿐, 아는 것은 사사로운 이익 뿐, 그런 까닭에 조국 문명을 경시하고, 또 조국 동포를 초개로 여기는 일이 많았다. 러시아어를 모르는 노동자들은 청부인들의 불공정한 행태를 알면서도 항의하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러시아 말은 물론 러시아어를 자유자재로 쓸 수 있었던 최재형은, 통역원으로 일을 하면서 한인들의 권익보호에 앞장섰다.

도로공사의 청부업자와 한인 노동자들 간에 충돌이 발생하면, 최재형은 항상 한인노동자들의 입장에서 해결해 주었다. 이에 한인들은 모두 최재형의 인간성과 동포애를 존경하게 되었다.

최재형은 도로건설 등 많은 분야에서 10여 년 동안 통역 일을 하면서, 한인들의 신임을 얻게 되었다. 한인들은 최재형의 이름인 ‘최 표트르’의 애칭인 ‘최 페트카’를 부르기 쉽게 ‘최 비지캐’라고 불렀다고 한다. 최재형은 한인노동자들의 입에서 입으로, 한인 사회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러시아 정부는 최재형에게 300여 명의 노동자를 할당해 주면서, 얀치혜에서 멍고개까지 도로공사의 책임자로 임명한다.

그 결과 한인들은 최재형이 맡은 도로공사에서 성심성의를 다해 일을 했고, 도로공사는 성공리에 마무리 되었다.

1888년 러시아의 니꼴라이 2세는 도로건설의 성공을 치하하며 최재형에게 은급훈장을 수여했다.

이 훈장은 최재형이 러시아 정부로부터 받은 수많은 훈장 가운에 첫 번째 훈장이 되었다.

이 무렵 러시아의 행정제도도 변화를 맞았는데, 1884년에 한.러 수교 후에는 행정구역을 개편하여 읍을 신설했다. 이 때 한인들이 많이 살고 있는 얀치혜를 읍으로 승격시켰다.

한편 한인들의 등급도 차등을 두었는데 최재형처럼 1884년 이전에 이주한 사람들에게는 가족 당 토지를 할당해 주고, 러시아 농민과 동일하게 금전이나 현물로 납세를 낼 수 있게 했다.

그 이후에 이주한 사람들은 러시아에 계속 거주하기를 희망하는 사람들에게 2년간 기한을 주고, 매년 비자를 발급받도록 했다. 마지막 세 번째 그룹은 변두리에서 임시로 거주하는 한인들로써, 러시아에 정착할 자격은 갖지 못했지만 매년 세금을 납부하고 비자를 발급받아야 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최재형은 일찍 러시아에 들어갔으므로 귀화가 허락되어, 군인과 공무원에 등용될 수 있는 특전과 토지를 무상으로 분배받을 수 있는 권한을 부여받았다. 최재형과 같은 사람들이 모여 사는 동네를 원호촌이라고 했다.

그러나 귀화하지 않은 한인들은 살기가 어려워, 러시아 국적을 얻으려고 각종 방법을 이용하여 러시아 측과 교섭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이때 남도소의 서기와 통사로 일을 하던 최재형은 외국인 신분을 가진 한인 이민자들을, 러시아 국적에 편입시키는 것이 주요 임무였다.

1898년 새로 온 총독도 이전 총독의 정책을 계승하여, 최재형처럼 첫 번째 그룹에 속하는 사람들 중 제외된 사람들을, 러시아에 입적을 허용했고, 두 번째 그룹에 있던 한인들에게는 5년 이상 변두리에 거주한 사람들에게 입적을 허용했다.

그리고 세 번째 부류인 한인들에게는 이만, 호르, 키, 아무르 강변에 정착할 수 있도록 허락하였다.

러시아에서는 1895년 얀치혜 지역에 한인마을이 점점 많이 형성됨에 따라, 얀치혜 마을을 중심으로 새로운 행정단위인 군을 설치하고 얀치예 남도소라고 명명하였다.

얀치혜 남도소는 러시아 관원의 인허가 아래서 이루어진 한인 자치기관이었다.

도소에는 서양식 사무실인 도소실을 건축하여, 러시아인의 인허가를 받은 책임자를 도헌(군수)이나, 사장을 두어 각 마을에 있는 한인들을 관리하고 모든 세금을 수납하는 일을 담당하도록 했다.

최재형은 1893년 러시아 지방당국으로부터 바로 얀치혜 남도소의 책임자로 임명을 받았다. 노비출신의 최재형이 33세에 얀치혜 군수가 된 것이다.
<참고서적> 박환 교수의 <시베리아 한인 민족운동의 대부 최재형>, 문영숙의 <독립운동가 최재형>
<계속>
가금현 기자 ggh7000@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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