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회]최재형 의병투쟁 시기 심사숙고

문영숙의 꼭 알아야 할 항일독립운동가 최재형
[16회]최재형 의병투쟁 시기 심사숙고
  • 입력 : 2022. 05.24(화) 09:59
  • 가금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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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영숙의 꼭 알아야 할 항일독립운동가 최재형/CTN]최재형은 이범윤과 항일의지를 가지고 의병들을 모집했다. 한인들은 최재형이 써 준 신임장을 보고 이범윤을 적극적으로 도왔다.

한편 한.러 국경지방에는 많은 수의 러시아 패잔병이 있었다. 이들은 러일전쟁에서 러시아가 패하자 파면되거나 해산명령을 받았지만, 봉급도 제대로 받지 못해서 무척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었기 때문에, 한인 의병을 돕거나, 또는 직접 지원하기도 했다. 러일전쟁으로 일본을 적대시하는 공감대가 한인의병들과 통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러시아 군을 상대로 싼값에 무기를 사들일 수 있었는데, 러시아 인맥이 탄탄한 최재형이 큰 역할을 했다.
이범윤은 의병이 모이자마자 곧바로 국내진공작전을 감행하고 싶어 했다. 그러나 최재형은 국제적인 안목을 갖고 있을 뿐만 아니라, 무기구입과 군자금 모금등 전반적으로 모든 준비가 갖춰진 다음에 하자고 이범윤을 설득했다. 최재형은 당시 한인들의 정서를 고려하여 항일의식이 무르익을 때를 기다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국내에서 먼저 의병활동이 전개되기를 기다렸다가 국내와 합동작전을 수행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1905년 일제가 한국의 황제를 비롯해서 각료들을 위협하여 을사늑약을 체결했다. 그러나 고종의 옥쇄가 찍혀지지 않은 강제늑약이었다. 을사늑약으로 대한제국은 외교권을 박탈당했고 일본은 통감부(統監府)를 설치하여 대한제국의 실권을 하나하나 장악해 나갔다.
고종은 은밀하게 을사늑약에 반대하는 친서를 국외로 보냈다. 마침 1906년 6월 평화회의의 주창자인 러시아 황제 니콜라스 2세(Nicholas Ⅱ)가 극비리에 고종에게 제2회 만국평화회의의 초청장을 보내왔다. 고종은 블라디보스토크에 있는 이용익에게 헤이그 평화회의 참석을 지시했다.

그러나 원래 1906년에 열릴 예정이었던 제2차 평화회의가 강대국들의 사정으로 1년이나 연기되어 1907년 6월에 열리게 되었고, 그동안 러시아의 입장이 바뀌어 버렸다.
1906년 4월 3일 자로 헤이그 주재 러시아 대사 차리코프(Tcharykow)가 네덜란드 외무성에 보낸 서한을 보면, 대한제국은 분명히 초청장을 발송한 47개국 중 12번째로 명단에 있었다.

그러나 1906년 5월 새로이 러시아 외상으로 취임한 이즈볼스키(A. P. Izvolskii)는 러시아의 동아시아 전략을 일본과 타협하는 쪽으로 반전시켰다. 그에 따라 6월 7일 주일 러시아 공사 바흐메쩨예프는 일본 외무대신에게 평화회의에 대한제국을 초청한 사실을 알리면서, 일본 측 의사를 타진했다. 일본은 당연히 대한제국의 평화회의 참석을 반대했다.

이준과 이상설은 1907년 6월 4일 러시아에 도착하여 주러 공사 이범진의 아들인 이위종과 합류했다.
고종은 특사단을 통해 러시아 황제에게 "대한제국은 러일전쟁 이전에 이미 중립을 선언하여 세계가 중립국임을 다 알고 있는데 (···) 일본이 1905년 11월 18일 늑약 이후 우리나라에 가한 모욕과 기만에 대해 심히 민망하던 차에, 헤이그에서 평화회의가 열린다는 말을 듣고 전(前) 의정부참찬 이상설과 평리원 판사 이준, 주러시아 공사관 참사관 이위종을 위원으로 특파하여, 일본의 불법 행위를 각국 위원에게 알리고자 하니, 세계가 모두 대한제국의 고난을 알고 공법(公法)에 의거하여 공의(公議)로써 다시 대한제국의 국권을 찾을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친서를 보냈다.

특사단은 러시아 측 지원을 얻기 위해 15일간이나 페테르부르크에 체류하면서 교섭을 벌였지만, 결국 니콜라이 2세를 만나지 못했다. 러시아는 당시 1907년 7월 30일에 타결된 러일협약을 앞두고 있던 시점으로, 일본과 비밀협상을 통해 몽골에서 특수 이해를 보장받는 대신 대한제국에서 일본의 자유행동을 인정하기로 합의한 만큼, 당연히 대한제국 특사단의 지원 요구를 들어줄 수 없었다.
특사단은 할 수 없이 6월 19일 페테르부르크를 출발하여 베를린에 들러 공고사(控告詞)를 인쇄하고 평화회의가 시작된 지 열흘이나 지난 6월 25일에 헤이그에 도착했다.

이 공고사의 내용은 『만국평화회의보』 뿐만 아니라 『런던 타임즈』, 『뉴욕 헤럴드』 등에도 전재되었으며, 특사단 중 이위종이 7월 8일 각국 신문기자단 국제협회에 참석하여 행한 연설 '대한제국 특사단의 호소(L’Appel des delegues Coreens)'도 언론에 대서특필되었다.
그러나 7월 14일 만국평화회의에 들어갈 수 없어 울분을 토로하던 이준이 숙소에서 갑작스럽게 심장마비로 순국했다.

참고서적 : 박환 저 <시베리아 한인민족운동의 대부 최재형>,[네이버 지식백과] 헤이그특사사건 [─特使事件]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가금현 기자 ggh7000@hanmail.net
가금현 기자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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