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회]꿈꾸는 자만이 성공한다

리채윤의 실천하라, 정주영처럼
[4회]꿈꾸는 자만이 성공한다
- 리채윤 CTN/교육타임즈 논설위원
  • 입력 : 2024. 01.30(화) 16:16
  • 가금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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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채윤 CTN/교육타임즈 논설위원
[리채윤의 실천하라, 정주영처럼/CTN] 꿈꾸는 사랑은 볼 수도 만질 수도 없지만 그로 인해 마음이 얼마나 풍요로워질 수 있는지는 안다.
- 박희숙, '그림은 욕망을 숨기지 않는다' 중에서

많은 사람들이 창업과 자수성가를 꿈꾸지만

창업을 꿈꾸는 대다수 직장인은 공상이나 망상에만 파묻혀 창업을 '꿈'으로만 간직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젊은 시절에 많은 사람들이 창업과 자수성가를 꿈꾸지만 사실 기업가로 성공한다는 것은 수 십, 수 백만 명 중에 한 명 있을 정도로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자수성가에 성공한 기업인의 경우 기업을 일으킨 방법은 저마다 다르지만 각기 특징이 있는데, 공통점이라면 '꿈'을 가지고 있고, 근면하고 성실하다는 점일 것이다.

이 점에서 정주영은 가히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순발력과 부지런함을 가지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는 한마디로 말해서 개척자적 자수성가형 인물의 대표자라고 볼 수 있다. 정주영은 일제치하의 어려운 시절에 사업을 시작한 탓에 여러 번 사업을 접어야 했고 그때마다 새로운 사업을 창업해야 했다. 그는 어린 시절 겪었던 가난 때문에 사업을 해서 큰돈을 벌어야 한다는 막연한 포부에서 사업을 시작했다. 하지만 그는 '하면 된다'는 불굴의 도전정신과 창의적 노력, 진취적 기상으로 자신의 꿈을 키워나갔다.

해방이후, 현대자동차공업사로 성업을 누리고 있을 무렵 정주영은 건설업에도 손을 뻗기 시작했다. 새 사업 분야로 진출하는 데는 장애가 없지 않았다. 정주영이 막상 토건업 간판을 내걸려고 했을 때 우선 측근들의 만류가 대단했다. 제일 먼저 매제 김영주의 반대하고 나섰다.

"형님, 토건업은 첫째 자기 자본도 넉넉해야 하지만 경험이 있어야 하는 겁니다. 자동차나 만지던 우리가 어떻게 토건업을 합니까?"
경리를 맡고 있는 친구 오인보도 반대했다.
"토목이나 건축공사라는 게 한두 달에 끝나는 게 아니잖은가. 어떤 공사는 년도 걸리고 이년도 걸리는데... 물가는 자고 새면 오르니 잘못 공사를 맡았다간 망하네 망해."

하지만 정주영은 토건업이 전혀 생소한 분야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가출했던 시절 공사판에서 일해 본 경험이 있었다. 그리고 그는 토건업이라는 것이 대개가 수리 영선에 지나지 않았으므로 견적서 넣고 계약하고 일해 주고 돈 받기는 자동차 수리업이나 진배없다고 생각했다.

결국 정주영은 건설 현장에서 일을 했던 개인적인 경험과 또 자동차수리업을 통해 얻은 자신감을 바탕으로 건축업에 뛰어든다. 정주영이 토건업에 관심을 갖게 된 직접적 동기는 건설업자들이 받아가는 금액이 엄청나게 많은 데서였다.

정주영은 관청이나 미군 부대의 자동차 수리를 해주고 기껏 30, 40만 원 받고 있었는데 건설업자들은 1,000만 원 단위로 받아가는 것이었다. 똑같이 견적을 내서 계약을 하고 돈을 받는 것은 마찬가지인데 거래 단위가 하늘과 땅 차이인 것을 보고 정주영은 현대자동차 건물에다 현대토건사 간판을 내걸은 것이다. →이 부분은 인용부분을 풀어서 쓴 것입니다.

현대는 1947년 5월 25일을 창립 기념일로 하고 있다. 이 날은 현대건설의 전신인 현대토건이 발족한 날이다.

헌대건설의 첫 해외 건설 사업

정주영의 개척자 정신이 본격적으로 빛을 발하기 시작한 것은 해외시장 개척에서부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50년대를 통해서 국내 굴지의 건설회사로 기틀을 다진 정주영은 협소한 국내 시장에서의 한계를 느끼고 밖으로 눈을 돌린 것이다.

정주영은 해외 진출을 모색하지 않으면 조만간 건설업은 벽에 부딪힐 것이라는 예상을 하고 있었다. 정부 주도의 국내건설 투자에는 한계가 있었고, 게다가 수급불균형은 점점 심각해져 가는 추세였으며 군납공사 시장 또한 위축되어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1960대에 들어서면서 미국이 국내업체 참여를 제약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곤욕을 치르자 그는 해외로 나가서 활로를 찾자고 마음을 굳히며, 해의건설시장 진출에 대해 보다 적극적으로 생각하기 시작했다.

정주영은 진작부터 꿈을 가지고 앞을 내다보고 있었다.

현대는 1959년도에 벌써 자가 발전소를 설치했었고, 그것으로 본격적인 플랜트 공사라고는 할 수 없었지만 이미 플랜트 공사에 눈을 돌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다 보니 경제개발계획이 시작되고 전원개발이 본격화되면서 감천발전소, 삼척발전소, 영월발전소, 군산발전소, 인천발전소, 그리고 원자력까지 엄청난 공사를 하게 된 것이다.

더구나 다목적댐 건설을 하면서 수력발전소까지 거의 모든 발전소에 현대가 참여하게 되었고, 따라서 다른 어떤 회사보다도 기계, 전기 분야, 플랜트 사업부가 크게 강화되었다. 결국 현대는 이처럼 앞서서 플랜트 공사를 해왔기 때문에 외국에서의 공사들이 가능했던 것이다.

훗날 현대가 중동시장에서 세계적인 경쟁사들을 따돌리고 적지 않은 규모의 플랜트 공사를 손에 쥐게 된 것은 토목기술이 뛰어나서라기보다는, 중동 진출 이전에 국내에서 플랜트 분야에도 어느 정도 경험을 축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흔히 하는 말로 막노동판에서 출발한 현대가 종합기술을 필요로 하는 플랜트 공사까지 넘겨다 볼 수 있었다는 점에서, 우리는 현대가 여느 건설회사 하고는 분명히 달랐음을 알 수 있다.

헌대건설의 첫 해외 건설 사업은 1965년 태국 건설성이 발주한 나라티왓 고속도로 공사 국제입찰하면서부터였다. 태국의 고속도로 건설을 현대가 시공하게 됐다는 사실은 마치 국가적인 경사나 되는 것처럼 여겨져서 KBS가 공항의 출국 실황을 중계할 정도였다. 수출입국을 지향하는 우리나라 건설용역의 해외진출을 알리는 첫 신호였기 때문이다.

뭐든지 봐두면 다 공부가 되는 거야

정주영으로서는 사운을 걸고 도전한 공사였는데 해외 환경이 국내와 달라도 너무 달라서 계속적인 적자가 났다. 한국건설사상 최초의 해외 공사인 태국 파타니 나라티왓 고속도로 공사에서 적자를 보자, 정주영은 새로운 돌파구를 찾기 위해 고심하고 있었다.
다음 해인 1966년 포탄이 머리 위로 날아다니는 베트남 전쟁터에서 준설 공사가 한창일 때, 그는 그 공사에 필요한 준설선을 사러 일본에 갔다. 정주영은 준설선 계약을 마치고 나서 당시 동행했던 현대건설 상무 이춘림에게 말했다.
“바쁜 약속 없으면 내일 나하고 조선소에 한 번 가보자.”
“조선소에는 왜요?”
이춘림은 전혀 의외라는 듯 눈을 크게 뜰 수밖에 없었다.
“뭐든지 봐두면 다 공부가 되는 거야.”
다음날 아침 정주영은 이춘림과 함께 일본 종합상사 부사장의 안내를 받아 이시가와지마 하리아(石川烏滯磨)중공업의 요코하마조선소를 방문했다. 생전 처음 보는 조선소는 무척 광대했고, 큰 도크에서 선박이 건조되고 있는 장면은 그야말로 장관이 아닐 수 없었다.
“갑자기 조선소는 왜 둘러보시는 겁니까?”

이춘림은 어제 물었던 말을 다시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시 현대건설의 입장에서 볼 때, 아니 한국 경제 규모로 볼 때 조선소 건설은 꿈도 못 꿀 때였다. 더구나 일본 조선소의 엄청난 규모에는 기가 질릴 지경이었다.

정주영은 아무 말 없이 직경 1.5미터가 넘는 기어와 길이 6미터가 넘는 대형 샤프트를 깎고 있는 기계 공장을 바라보고 있다가 문득 이춘림에게 물었다.
“이상무! 그래, →보라색 글자는 삭제해 주세요. 이거 말이야, 우리도 설계만 있으면 이거 만들 수 있지 않을까?”
“도면만 있으면 되겠지요.”
이춘림은 자신도 모르게 그렇게 대답하고 말았다. 정주영의 적극성에 압도되어 그냥 나온 대답이었다. 어쩌면 당시 현대건설은 발전소 건설 경험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조선소 건설도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없지는 않았으리라.
그리고 그 →보라색 글자는 삭제해 주세요.

다음날 정주영은 가와사키 (川崎)중공업의 고베조선소도 방문했다. 그곳에는 대 · 중 · 소의 여러 도크가 있었고, 각 도크마다 인부들이 일사불란하게 용접 불통을 튀기며 열심히 작업을 하고 있었다. 조선소를 둘러보고 오는 길에 정주영이 이춘림에게 말했다.

“이제 준설선을 마련했고 하니, 항만 건설의 노하우도 쌓아야 할 거야. 해외에서 건설을 하다 보니 기후 · 풍토 · 언어 · 습관 등이 다르기 때문에 공사에 어려움이 많아. 해외 건설에서 좀 더 노하우를 쌓은 다음 우리도 국내에다 조선소를 건설해야겠어. 해외에 나가 외화를 벌어들이는 것도 국가를 부강하게 만드는 일이지만, 국내에다 조선소를 짓고 큰 배를 만들어 외국에 내다파는 것도 큰돈을 벌 수 있는 일 아니겠어?”

이미 정주영은 1966년부터 조선소 건설을 꿈꾸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자신이 마음속에 숨겨두고 있던 것들을 약간 들뜬 목소리로 계속 이야기했다.

“당장 설계하는 것은 어렵겠지만 철판을 만들고, 그 내부에다 보일러와 엔진과 발전기를 설치하고, 또 프로펠러를 달면 되지 않겠어?”
상기된 얼굴로 흥분을 감추지 못하며 이야기하는 정주영의 얼굴은 한창 꿈 많은 소년의 그것과 같았다. 그리고 정주영의 조선소에 대한 꿈은 몇 년 후인 1972년 3월 울산조선소의 기공식을 올리면서 현실화되었다. 망상이라고 비웃을 수도 있지만 천하는 결국 꿈꾸는 자에게 정복당하게 마련이다.

이처럼 정주영은 일제 강점기에 가난한 농군의 아들로 태어나 맨주먹으로 사업을 시작했고, 전쟁의 상처를 딛고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해온, 한국 경제의 역사이자 증인임을 온몸으로 보여주고 있다.

그는 열아홉 살에 부두와 건설현장의 막노동꾼, 쌀가게 점원으로 시작해서 '하면 된다'는 불굴의 도전정신과 창의적 노력, 진취적 기상으로 현대(現代)그룹을 창업하여 한국을 대표하는 대그룹으로 일으켜 세운 개척자적인 자수성가형 사업가이다.

그는 무슨 아이디어든지 사업으로 전환해서 이익 창출의 기회를 마련하는데 천재적인 소질을 발휘하며 경부고속도로의 건설, 해외건설 시장 진출, 세계 최대의 조선소 건립, 세계를 누비는 자동차… 등을 통해서 한국 경제발전의 기틀을 다지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세계인이 찬탄해마지 않는 1970년대 ‘한강의 기적’은 기업인 정주영 같은 걸출한 제1세대 기업가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가금현 기자 ggh7000@hanmail.net
가금현 기자 입니다.
긍정적인 사고로 의리를 지키며 살고싶다.
술은 웃음소리가 밖에까지 들리도록 마셔라!
내가 그자리에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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