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회]사임당과 율곡이 태어난 집 오죽헌

리채운의 신사임당의 자녀교육법
[5회]사임당과 율곡이 태어난 집 오죽헌
  • 입력 : 2021. 07.12(월) 17:03
  • 가금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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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사임당의 자녀교육법/CTN]신사임당과 율곡 이이는 두 사람 다 오죽헌에서 태어났다.

그곳은 신사임당의 어머니인 용인 이씨가 태어난 곳이기도 하다.

강릉은 동해 바닷가에 있는 아담한 도시로, 서쪽으로 대관령이 병풍처럼 처져있고, 동쪽으로는 푸른 동해 바다가 펼쳐져 있고, 역사적으로는 고대 한민족의 한 갈래였던 예(獩)나라가 있었다.

강릉은 예나라의 수도로서 빛나는 문화와 전통이 서린 곳이고 그림같이 아름다운 풍광과 인심이 순후한 지역이다.

이중환이 《택리지》에서 "동문 밖에 사람 살 만한 곳은 강릉뿐"이라고 할 만큼 학문과 예절을 숭상하는 문향의 고장이다.

이 강릉에서 동북쪽으로 7킬로미터쯤 가면 거울처럼 맑은 경포 호수가 있고, 관동팔경의 하나인 경포대(鏡浦臺), 그리고 한송정(寒松亭) 같은 명소가 있다.

경포대에서 다시 서쪽으로 조금 떨어진 곳에 북평촌(지금의 강원도 강릉시 죽헌동)이란 마을에 오죽헌(烏竹軒)이란 집이 있다.

오죽헌은 조선시대 중기의 양반집 모습을 보존한 소박한 팔작집이다. 뒤꼍에 까마귀처럼 검은 대나무(烏竹)가 우거져 있다 하여 오죽헌이라 불렀다. 오죽은 밑동이 가늘고 키가 자그마하지만 생명력이 강인해서 강릉 추위에도 잘 자랐다.

오죽헌을 언제, 누가 지었는지에 대해서는 확실한 기록이 전하지 않지만 연산군 때 대사헌과 형조참판을 지낸 최응현(崔應賢,1428~1507)의 집이었다.

일설에는 세종 때 이조참판을 지낸 그의 부친 최치운(崔致雲.1390~1440)이 지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최응현의 둘째 딸 강릉최씨가 용인이 본관인 이사온과 혼인을 하게 되자 최응현은 이 집을 사위인 이사온에게 물려주었는데 그가 바로 신사임당의 외할아버지다. 오죽헌에는 이사온이 지은 시가 새겨진 현판이 걸려 있다.

내 집이 작다 하나 살 만은 하고
울타리 나지막해 사방이 훤해
주변에 푸른 산은 천고의 그림
온 시련 겪은 오죽 이 집의 보배

신사임당과 율곡 이이는 두 사람 다 오죽헌에서 태어났다.

그곳은 신사임당의 어머니인 용인 이씨가 태어난 곳이기도 하다. 사임당의 아버지 신명화는 이사온의 무남독녀 외동딸인 용인 이씨와 결혼을 했는데 딸만 다섯을 내리 낳았고, 그때까지 처가살이를 했다.

외가인 오죽헌에서 태어난 신사임당은 외조부인 이사온과 외조모 최씨 부인, 그리고 어머니 밑에서 성장했다.

원래 오죽헌은 최응현의 고택에 딸린 별당이었다.

앞면 세 칸, 옆면 두 칸의 팔작 기와지붕은 얻는 건물인데, 1963년 보물 제165호로 지정되었다.

건물 왼쪽 두 칸은 대청마루로 율곡이 어린 시절 어머니로부터 글을 배우던 곳이고, 오른쪽 한 간은 온돌방으로 그곳이 사임당과 율곡이 태어난 곳이다.

외할아버지 이사온은 생원으로 벼슬을 하지 않고 처가살이를 하면서 자연스럽게 오죽헌을 물려받았다.

처가살이 전통은 아버지 신명화에게도 이어졌다. 그는 본래 한양 사람인데 혼인 후 부인을 본가로 데려가지 않고 자신이 16년 동안 서울과 강릉을 오가며 생활했다.

신명화가 사위 이원수에게 처가살이를 권했던 것도 그러한 자신들의 내력 때문이기도 했을 것이다.

혼인 후 이씨 부인은 남편을 따라 시댁이 있는 한양으로 올라가서 시부모를 모셨다.

그러던 중 강릉의 친정어머니 최씨 부인이 위독한 사태를 만나 시댁의 허락을 얻고 강릉으로 내려와 어머니의 병구완을 했다.

그 후 이씨 부인은 늙고 병든 어머니를 홀로 떠나기 어렵다며 강릉에 눌러 앉았다.

남편 신명화는 이를 받아들였고 그들의 자식인 딸 다섯은 모두 강릉에서 성장했다.
당시는 연산군 때로 정치적으로 어지러웠던 때라 원래 세상의 권력 다툼을 멀리했던 신명화는 공부는 많이 했으나 과거시험에 응시도 하지 않고 강릉에 머물면서 딸들을 가르쳤던 것이다.

신사임당은 결혼 후에도 대부분 세월을 친정에 머물러 살면서 아들 율곡을 자기가 태어난 방에서 낳아 기르면서 글을 가르쳤다. 모자지간에 이처럼 끈끈한 인연이 따로 더 있을 수 있으랴!

그들 모자의 끈끈한 정은 오늘날에도 이어져서 아들은 5천 원권 어머니는 5만원권 지폐의 주인공으로 현대인의 일상에까지 묻어나고 있다.

어머니와 아들이 그 나라 지폐의 주인공으로 활약하고 있는 경우는 세계에서 유래가 없는 일이기도 하다.

오죽헌은 후대에 조성된 걸 제외하면 원래 딱 한 채였는데 1975년 10월 오죽헌 정화사업으로 지금의 모습으로 단장된 것이다.

규모로 보면 도산서원, 소수서원, 병산서원 등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아담해서 마치 청렴했던 율곡의 일생처럼 단아한 기품을 내보이고 있다.

오죽헌 경내에는 신사임당이 아들 율곡을 임신하여 낳은 몽룡실, 인조 임금이 율곡에게 내린 시호 문성 및 영정을 모신 문성사, 정조 임금이 율곡의 학문을 찬양하여 내린 글을 보관한 어제각, 그리고 율곡기념관, 옛날 집인 구옥의 안채와 바깥채, 시립박물관 등이 있다, 오죽헌에는 신사임당의 좌상과 이율곡의 동상이 서있다.

그 동상 옆의 기념석에는 율곡이 직접 쓴 '견득사의(見得思義)'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다.

견득사의는 『격몽요걸』 「지신장」에 나오는 글귀인데 본래 『맹자』에 나오는 구절이다.

공자는 "군자는 의(義)에 밝고 소인은 이 (利)에 밝다."라고 했다.

군자는 의(義)를 추구하지 이(利)를 추구하지 않는다고 이해할 수 있지만, 사실 이(利)를 공평하게 나누는 것이 의(義)이므로 이(利) 자체를 배격했다기 보다는 의(義) 없는 이 (利)를 배격했다고 이해해야 한다. 견득사의(見得思義)는 합리적인 경세가 율곡의 그런 측면을 잘 드러내 주는 문구가 아닐 수 없다.

정조는 누구보다도 율곡을 기리는 데 앞장섰다, 1788년(정조 12년)에 정조는 오죽헌에 보관 중이던 벼루를 직접 보고는 『격몽요결』의 서문을 쓰고, 오죽헌 옆에 각(閣)을 세워 그것을 보관하게 했는데 현재도 오죽현에 보관되어 있다.

오죽헌의 뜰에는 사군자 중의 하나인 매화가 있는데 그 매화를 '율곡매'라고 부른다.
가금현 기자 ggh7000@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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