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회]신사임당을 만든 또 한 사람 '한량남편 이원수'

리채운의 신사임당의 자녀교육법
[10회]신사임당을 만든 또 한 사람 '한량남편 이원수'
  • 입력 : 2021. 11.08(월) 09:28
  • 가금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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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채윤의 신사임당의 자녀교육법/CTN]이원수는 우유부단하고 자기 주관이 뚜렷하지 않은 사람 같지만 장인 신명화와의 약속을 칼 같이 지킨 ‘의리남’이었다. 우선 그는 아내보다 자신의 학문이 짧은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앞에서도 밝혔지만 신사임당이 여성으로서 역사에 우뚝 이름을 남길 수 있었던 데는 남편 이원수의 공도 상당히 크다 할 수 있겠다. 남편은 명문가문 출신이기는 하지만 여섯 살에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 밑에서 외아들로 자란 탓에 배움이 신사임당보다 한없이 짧았다. 이원수는 과부의 외아들로 학문을 가르쳐줄 만한 스승을 만나지도 못했고 타고난 기질은 놀기를 좋아하고 공부는 싫어했던 것 같다.

그런데 이원수에게는 커다란 장점 몇 가지가 있었다.

이원수는 우유부단하고 자기 주관이 뚜렷하지 않은 사람 같지만 장인 신명화와의 약속을 칼 같이 지킨 '의리남'이었다. 우선 그는 아내보다 자신의 학문이 짧은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그는 너그럽고 겸손한 성품으로 모진 구석이 없는 호남아였다. 깐깐한 장인 신명화가 그런 점을 높이 사서 영특한 딸을 맡기게 되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이원수는 빈틈도 많은 사나이였다. 그는 기분파였고 경제관념도 없어서 신사임당이 한양 생활을 시작한 이후에는 경제적 어려움 때문에 고생을 많이 해야 했다. 7남매나 되는 아이들을 키우느라고 등골이 휘는데 남편이라는 사람은 한량 그 자체였다. 신사임당의 눈에 '서방님' 이원수는 그냥 '원수' 그 자체였는지도 모른다. 이원수의 유유자적하게 놀기를 좋아하는 타고난 성품 때문에 신사임당의 속은 시커멓게 타들어갔을 지도 모른다.

오직하면 율곡이 <어머니 행장>에는 "아버지께서 실수하는 일이 있으면 반드시 친히 간諫()하다"라는 대목을 적었을까! 신사임당은 올곧고 담백한 성격이었던 탓에 남편의 잘못을 용납하지 못했던 것 같다. 이능화(李能和, 1869-1943)의 <조선여속고(朝鮮女俗考)>를 살펴보면 "이공의 학업이 허술하면 신씨가 이를 보태어 그 잘못을 깨닫게 그곳을 바로 잡았으니 참으로 어진 아내였다"라고 신사임당에 대해 기록하고 있다.

# 장면 1

신사임당이 오죽헌에 살 때의 일이다.
신사임당은 첫아들을 낳자, 하루는 남편에게 조용히 말했다.
"사나이 대장부로 이 세상에 태어나 그럭저럭 한세상 살다 죽으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모름지기 사나이라면 학문을 닦아 세상 필요로 하는 군자의 길을 걸어야 하지 않나요? 서방님과 저는 앞으로 10년간을 기약하고 헤어져서 서방님이 학문을 닦은 뒤에 만나기로 합시다."

신사임당의 이러한 선언은 물론 낭군을 큰 인물로 만들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결심이 굳세지 못한 낭군은 오죽헌에서 20리쯤 되는 성산(城山)이란 곳까지 갔다가 집으로 되돌아왔다.

그런 상황을 미리 예상했던 신사임당은 낭군을 냉정하게 꾸짖었고 다음 날 다시 길을 떠나게 했다.
이튿날도 이원수는 40리즘 되는 대관령 가마고을이라는 곳까지 갔다가 되돌아왔다. 짧은 인생에서 10년이란 세월을 너무 가혹하다는 것이 그의 변이었다. 신사임당은 싸늘한 얼굴로 말했다.

"사나이 대장부가 한 번 뜻을 세우고 떠난 길을 두 번씩이나 되돌아오다니요! 장차 아이들에게 어떤 아버지로 남고 싶습니까? 주무시고 아이들이 깨기 전에 얼른 떠나세요."
이원수는 아내의 등쌀에 못 이겨 또 다시 길을 떠났으나 이번에는 사흘이 지난 후에 다시 돌아오고 말았다. 그리고 하는 말이 걸작이었다.
"여보, 나는 원래 학문에 뜻이 없소. 나는 단신 곁에서 운우지정(雲雨之情)을 나누며 평범한 남편으로 살고 싶을 뿐이오."
그런 말을 들은 신사임당은 세상이 끝난 것과 같은 자괴감을 느꼈다. 그래서 차분하게 넋두리처럼 중얼거렸다.
"서방님만을 하늘처럼 받들고 살아가는 저에겐 이제 더 희망이 없나이다. 차라리 머리를 깎고 중이 되거나 목을 메어 죽을 것이옵니다."
이 말을 들은 이원수는 깜짝 놀라서 아내에게 굳은 약속을 하고 학업에 전념했다. 그러나 그것도 3년을 넘지는 못했다.

이원수의 사내대장부다운 모습은 다른데 있었다. 그는 조선시대 사대부의 일반적인 남자들과는 다른 현대적인 모습이 있었다. 그는 팔불출 소리를 들어가면서도 막무가내로 아내의 재주를 광고치고 다녔고, 그것을 행복으로 여겼던 사람이었다. 역설적이게도 이원수의 이런 '단무지' 같은 성격과 취향이 신사임당의 예술가로서의 자리를 보존해 주는 역할을 했다. 신사임당의 일화 가운데 놋쟁반 그림 이야기가 있다. 율곡의 증언을 들어보자.

한양 시댁으로 온 지 얼마 안 되던 때였다. 선친은 친구들에게 부인의 재예를 자랑하고 싶어서 그림을 청했는데, 모친은 난감해 했으나 남편이 계속 재촉하자 계집종을 시켜 유기쟁반을 가져오게 하였고 거기에다 간략하게 하나 그려 보였다.
- 율곡 이이, 「어머니 행장」

한마디로 이원수는 부인의 그림 솜씨를 자랑하고 싶어했고, 남에게 내세우는 걸 좋아하는 인물이었다.

# 장면 2

신사임당이 서울 시댁에 머무를 때의 일이다.
어느 날 남편 이원수가 친구들을 우루루 몰고 들어와 집안에서 술잔치를 벌였다. 어지간히 취기가 오르자 이원수가 아내를 불렀다.
"나는 당신이 너무나 자랑스럽소. 내 벗들에게 당신의 그림 솜씨를 한 번 보여주구려."
그러자 모든 남자들이 탄성을 질렀다. 그도 그럴 것이 이미 신사임당은 남녀 불문하고 당대 최고의 화가로 정평이 나 있던 터였다. 그래서 그림을 그리라고 청했는데, 정작 신사임당은 난감했다. 집안은 식구가 많고 수입은 없어서 그림 그린 화선지도 한 장이 없었다, 신사임당은 시골생활이지만 강릉으로 돌아가고 싶은 생각이 굴뚝같던 무렵이었다.
그림을 그릴 수도 안 그릴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그림을 그리자니 종이가 없고 안 그리자니 남편의 면이 서지 않는 상황이 전개 되고 있었다.
그대 신사임당의 뇌리를 스쳐가는 아이디어가 있었다.
"부엌에 가서 놋쟁반을 가져다다오."
신사임당은 낮은 목소리로 하녀에게 일렀다. 이윽고 놋쟁반이 들어오고 신사임당은 날렵한 붓놀림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녀는 먹이 다 마르기를 기다렸다가 놋쟁반에 보자기를 씌워 남자들이 있는 사랑채로 들여보냈다.
"이게 뭐야?"
"그림을 그려 달랬지. 누가 또 음식을 내오라 했느냐?"
이원수가 소리치고 있을 때 여자 하인이 쟁반의 보자기를 벗겼다.
아! 먹음직한 포도송이! 포도 넝쿨!
방 안의 모든 시선이 놋쟁반 바닥으로 모아졌다.

이원수는 조금은 부족한 사나이 같았지만 속 깊은 남편이었다. 그는 조선 최고의 여자 신사임당을 지키는 최고 최선의 보루였다. 하지만 예나 지금이나 능력 없는 낭군, 능력 없는 아버지는 존경을 받지는 못하는 모양이다.
아들 율곡은 아버지를 그다지 존경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어린 시절 그의 눈에는 어머니를 고생시키기만 하는 아버지의 모습이 각인되어 있었던 것 같다.

율곡은 어머니에 대한 기록, 외할머니에 대한 기록 심지어는 외할아버지 신명화에 대한 기록을 직접 썼으나 아버지나 친가에 대한 기록은 단 한 줄도 쓰지 않았다.
가금현 기자 ggh7000@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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