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회] 자경문

리채윤의 실천하라, 정주영처럼
[23회] 자경문
  • 입력 : 2023. 05.23(화) 09:47
  • 가금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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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채윤 도서출판 작가교실 대표
[리채윤의 신사임당의 자녀교육법/CTN] 3년상을 마친 29살 되던 해 7월과 8월에 시행된 과거에서 연거푸 장원을 차지하면서 세상을 놀라게 했다. 거리의 아이들은 율곡이 탄 말을 둘러싸고 '아홉 번 장원한 분[九度壯元公]'이라고 불렀다.

1년간의 방황을 끝내고 돌아온 율곡은 다시 성리학을 공부하면서 과거 시험에 매진했다.

그는 이미 13세에 초시에 합격하였으니 앞길이 창창한 수재였다. 20세에 속세로 돌아온 율곡은 강릉 외가로 갔다. 서울 집으로 가지 않고 76세의 외할머니만 계시는 외가로 간 것은 입산할 때 가족에게 알리지도 않고 떠난 것과 마찬 가지로 서모 권씨에 대한 불편한 감정이 남아 있었기 때문인 듯하다.

그는 돌아오자마자 「자경문」올 써 놓고 공부에 매진했다.
금강산에서 내려온 율곡은 인생의 목표를 정하고 그것을 실천해 나갈 구체적인 방안으로 자경문을 지었는데 일종의 좌우명이었던 자경문의 요지는 다음과 같다.

▲ 뜻을 크게 가지자 ▲마음을 안정시키자 ▲혼자 있는 것을 삼가자 ▲언제나 할 일을 먼저 생각하자 ▲일에 닥쳐서는 성의를 다하여야 한다 ▲옳지 않은 일은 절대 금하자 ▲자세를 항상 바르게 하자 ▲방심하거나 서두르지 말자.

자경문의 전체적 내용은 성현을 목표로 뜻을 크게 세운다는 것이 근본이었다. 그는 사람이 인생을 설계하는 데 무엇보다도 입지를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였는데 실로 이 입지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이 그의 사상이 두드러진 특색이었다.

40살에 지은 성학집요의 제일 앞머리에 입지장이 있고, 42살 때 지은 격몽요결의 첫머리에도 입지장을 두었으며, 47살에 지은 학교모범에서도 16조의 규범 첫 조에서 입지를 강조했다.
율곡은 입지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이유를 "뜻이 서지 않으면 만사가 성공하지 못하기 때문이다"라고 하였으며, 뜻을 세우는 방편에 대해서는 "참되면 뜻이 저절로 서는 법이고 그 뜻을 항상 공경하는 태도를 지녀야 뜻이 사라지지 않는다"고 했다. 그에게 그처럼 뜻을 세우는 법을 가르쳐 준 사람이 어머니 신사임당임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 구도장원공

21세 되던 다음 해(1556년. 명종 11년) 봄에 율곡은 서울로 돌아와서 한성시(漢城試)에서 장원을 차지했다. 이 무렵 율곡은 성균관에 입학하여 알성시(謁聖試)에 응시하려고 했는데, 그가 한때 승려가 되었다가 환속했다는 이유로 알성시에 응시할 때 유생들이 성균관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등 심한 따돌림을 당했다.
그러나 율곡은 23세 때 또다시 별시(別試)에 장원급제 했다. 율곡은 과거에 장원급제하여 써낸 「천도책天道策」이 많은 사람들에게 주목을 받았고 젊은 선비들이 율곡에게 가르침을 받고자 찾아왔다. 당시 고관(考官; 출제 위원)이었던 정사룡(鄭士龍)과 양응정(梁應鼎) 등은 그의 답안지 「천도책(天道策)」의 내용이 훌륭함에 매우 놀라 율곡을 천재라고 불렀다.

〈천도책〉은 천인합일관(天人合-觀)을 주장한 글로서, 이 글에 대한 소문이 멀리 명(明)나라에까지 알려질 정도였다. 후일 명나라 사신으로 온 황홍헌(黃洪憲)과 왕경민(王敬民)이 율곡을 찾아왔다. .
"바로 저 분이 〈천도책〉을 지은 분인가?"
통역관이 그렇다고 하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반갑게 율곡을 맞이했다. 명나라 사신이 율곡에게 물었다.
"극기복례(克己復禮)가 인(仁)의 뜻이 되는 이치가 무엇이오?"
율곡이 글을 지어 그것을 설명하자, 두 사신은 몇 번이나 읽고 나서 고개를 끄덕이며 매우 기뻐했다.
"설명하신 이 글이 매우 좋으므로 돌아가서 중국 조정에 널리 전하도록 힘쓰겠습니다."
23살 청년이 지은 〈천도책〉이 중국학자들에게 이토록 높은 평가를 받고 있었다는 것은 율곡의 재능이 얼마나 출중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가 아닐 수 없다.

율곡이 26세가 되던 해에 아버지 이원수가 세상을 떠났다. 향년 61세였다. 어머니가 떠나신지 꼭 10년 만이었다. 아버지의 죽음은 어머니의 죽음처럼 큰 충격을 준 것 같지 않다. 율곡은 3년간 아버지 시묘살이를 하면서 이 시기에 과거 공부에 몰두한 듯하다.

그래서 3년상을 마친 29살 되던 해 7월과 8월에 시행된 과거에서 연거푸 장원을 차지하면서 세상을 놀라게 했다. 이것으로 율곡은 전부 아홉 번이나 과거에 장원급제하여 거리의 아이들은 율곡이 탄 말을 둘러싸고 ‘아홉 번 장원한 분〔九度壯元公〕’이라고 불렀다.

29세 때 율곡은 호조좌랑(戶曹佐郎)에 임명되어, 드디어 중앙정치무대에 첫발을 내디디게 됐다. 그 뒤 율곡은 예조, 병조, 이조의 좌랑 (佐郎;정6품)을 거쳐 청직인 사간원 정언(正言;정6품), 사헌부 지평(持平; 정5품), 그리고 홍문관 교리(校理; 정5품)등 요직에 두루 오른다. 그것은 그가 아무리 아홉 번이나 시험에 장원한 우수한 인물이라 하더라도 매우 파격적인 것이었다.
가금현 기자 ggh7000@hanmail.net
가금현 기자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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