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장 할 수 있는 것부터 시작한다

리채윤의 실천하라, 정주영처럼
제1장 할 수 있는 것부터 시작한다
- 이채윤 CTN/교육타임즈 논설위원
  • 입력 : 2023. 10.23(월) 13:13
  • 가금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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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채윤 CTN/교육타임즈 논설위원
[리채윤의 실천하라 정주영처럼/CTN] 나는 젊었을 적부터 새벽 일찍 일어난다. 왜 일찍 일어나느냐 하면 그날 할 일이 즐거워서 기대와 흥분으로 마음이 설레이기 때문이다. 아침에 일어날 때의 기분은 소학교 때 소풍가는 날 아침, 가슴이 설레는 것과 꼭 같다. 또 밤에는 항상 숙면할 준비를 갖추고 잠자리에 든다. 날이 밝을 때 일을 즐겁고 힘차게 해치워야겠다는 생각 때문이다. 내가 이렇게 행복감을 느끼면서 살 수 있는 것은 이 세상을 아름답고 밝게, 희망적으로, 긍정적으로 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 1983. 7. 29, 신입사원 하계수련대회 특강에서

1. 시작한 것은 중간에 포기하지 않는다

꿈을 품고 무언가 할 수 있다면 그것을 시작하라.
새로운 일을 시작하는 용기 속에 당신의 천재성과 능력과 기적이 모두 숨어 있다.
-괴테


'무언가를 잃는 것은 또 다른 무언가를 얻는 것이라고'

‘세상의 중심에서 사랑을 외치다’란 소설을 보면 남자친구를 찾아 가출한 여자 친구 가즈키를 만난 자리에서 주인공은 속으로 이렇게 말하고 있다.
‘무언가를 잃는 것은 또 다른 무언가를 얻는 것이라고’
정주영은 소년시절 가난한 농촌 생활이 싫어서 무려 네 차례나 가출을 시도했다. 집을 떠나면 굶주림과 제대로 된 잠자리조차 없는 고단한 환경이 그를 기다리고 있을 뿐이었다. 사랑하는 가족과 안온한 집이 늘 그리웠다. 그는 번번이 아버지에게 붙들려 끌려가야만 했으나 가출을 포기하지 않았다. ‘무언가를 잃는 것은 또 다른 무언가를 얻는 것이라고’ 소년 정주영은 믿었던 것이 아닐까.
소년 정주영에게 처음부터 엄청난 꿈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뼈 빠지게 일을 해도 세 끼 밥조차 제대로 먹기 힘든 농사꾼으로 살기 싫었을 뿐이다. 그 시대 우리 농민들의 가난은 그야말로 초근목피의 시절이었다.
정주영은 1915년 11월 25일 태어나서 일제의 압제가 가장 혹독한 시기에 자라났다. 전국에서 눈이 가장 많이 내린다는 강원도 통천군 송전면 아산리에서 6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난 그는 소학교에 들어가면서부터 아버지에게 대를 이을 ‘일등 농사꾼’ 수업도 받기 시작했다. 농사밖에 모르고 농사가 최고인 아버지는 장남인 정주영에게 농사를 물려주고 싶어 했다. 새벽부터 밤늦도록 아버님 옆에서 농사일을 배우며 도와야 했고, 학교 공부가 끝나 돌아와도 일을 해야 했으므로 거의 자유 시간이 없었다.
하지만 어린 정주영이 보기에 농사일은 미래가 내다보이지 않는 일이었다. 가진 농토는 손바닥만 하고 농사짓는 방법은 원시적이어서 일 년 내내 뼈 빠지게 일을 해서 다행히 풍년이 들어도 간신히 일 년 양식이 될까 말까였다. 비가 조금만 많이 왔다 하면 홍수가 망치고 조금 가물었다 하면 가뭄이 망치는 그저 하늘만 올려다보며 하는 농사일이 싫었다.
소학교를 졸업하자 소년 정주영은 집을 떠나 도회지로 나갈 결심을 굳혔다. 그런 어느 날, 이장집에 들러서 동아일보 신문을 보던 그는 청진 쪽에서 항만공사와 철도공사가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는 청진의 그 공사가 마치 자신을 위해 벌려 놓은 공사판처럼 생각되어 마구 흥분되었다.
그날 저녁, 저녁을 먹고 난 주영은 어머니가 빨아 다려놓은 흰 무명바지 저고리를 꺼내 입고 슬그머니 집을 빠져나와 청진을 향해 무작정 걷기 시작했다. 그것이 그의 첫 가출이다.
하지만 처음 가출에서부터 두 번째, 세 번째 가출에서도 그는 성공하지 못했다. 그때마다 아버지에게 덜미가 잡혀 고향으로 되돌아와야 했다. 기어이 고향에서 탈출하고야 말겠다던 소년 정주영의 집념도 대단했지만, 기어이 아들을 고향에 붙잡아두려 하셨던 아버지의 집념도 여간 대단한 것이 아니었다. 정주영의 아버지는 귀신같이 아들이 달아난 곳을 알아내고 찾아와서 그를 다시 고향으로 데려와서는 호통을 치셨다.
"너는 초등학교밖에 못 나온 놈이야. 잘난 사람들 많은 서울 땅에서 네가 뭘 해서 먹고살겠니?"
그때마다 정주영은 배움이 많고 적음이 아니라 노력의 많고 적음에 따라 삶이 결정된다고 생각했다.
아버지는 정주영이 처음 가출했던 청진의 철도 공사판으로 찾아와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는 우리 집안의 장손이다. 형제가 아무리 많아도 장손이 기둥인데 기둥이 빠져 나가면 집안은 쓰러지는 법이다. 어떤 일이 있어도 너는 고향을 지키면서 네 아우들을 책임져야 한다. 네가 아닌 네 아우 중에 누가 집을 나왔다면 내가 이렇게 찾아 나서지 않는다."
하지만 정주영은 아버지의 생각에 동의하지 않았다.
그는 어려서 훈장을 하시던 할아버지에게 한학(漢學)을 배운 후, 송전초등학교를 다녔다. 3년 동안 한학을 배우면서 소학(小學), 대학(大學), 자치통감(資治通鑑), 오언시(五言詩), 칠언시(七言詩)를 다 익힌 탓에 그는 학교 공부에서는 별로 배울 것이 없었다. 그는 학교에 있는 시간이 오히려 노는 시간처럼 여겨졌는데 성적은 늘 상위권이었다.
그는 비록 소학교 밖에 나오지 않았지만 결코 배움이 짧은 사람은 아니었다. 그는 대학이나 자치통감 같은 책을 꿰고 있었기에 세상 돌아가는 이치를 누구보다 빨리 깨달았고, 기업 경영에서 사람 부리는 법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어쨌거나 정주영은 송전소학교를 졸업하고 부모 밑에서 본격적으로 농사를 배웠다. 농토가 집에서 15리 정도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그는 새벽에 부친을 따라 밭에 나가 종일 일하고 저녁 늦게 귀가했다. 모친의 누에치기 일을 돕기 위해 뽕잎을 따러 심산유곡을 누비고 다니기도 했다. 정주영은 그의 어린 시절에 대해 “열 살 때부터 농사일을 거드는 것이 너무 힘들었고 항상 배가 고팠던 시절이었다”고 회고했다.
철강왕 카네기의 집은 어렸을 때부터 말할 수 없이 가난했다. 그래서 어린 카네기는 이렇게 결심한다.
“뼈가 가루가 되는 한이 있더라도 힘껏 일해 우리 집에서 영원히 가난을 쫓아버리겠다.”
아마 소년 정주영의 심정이 그러했을 것이다. 농사일로 일생을 보낼 수 없다고 생각한 소년 정주영은 조상 전래의 가난을 숙명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스스로의 운명을 개척하는 길을 선택한 것이다. 정주영은 네 번의 가출 끝에 서울에 정착하게 된다.

네 번의 가출 끝에 사업가의 길을 걷다
18살인 1931년의 마지막 가출로 인천 부두, 보성전문학교 신축 공사장 등지에서의 막노동꾼 생활을 거쳐 풍전 엿공장에서 일하던 정주영이 마침내 정착한 첫 직장은 서울 신설동의 쌀가게인 복흥상회다. 하루 세 끼 먹여 주고 쌀 한 가마니가 월급이었다. 그는 열심히 자전거 타는 법을 익히고 부지런히 근무했다.

“복흥상회에 취직한 다음 날 비가 오는데 주인이 쌀 한 가마하고 팥 한 말을 주인집에 배달하라는 거예요. 자전거는 서투르게나마 탈 줄 알았지만 물건을 싣고 배달해 보는 것은 처음이라서 여러 번 넘어져 핸들이 휘고 쌀가마가 온통 진흙범벅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날 밤부터 자지 않고 밤새껏 쌀을 자전거에 싣고 타는 연습을 했습니다. 한 사흘 그렇게 연습을 했더니 쓰러지지 않고 쌀 배달을 하게 되었습니다. 나중에는 쌀을 두 가마씩 싣고 배달할 수 있는 사람은 저밖에 없을 정도까지 되었습니다. 또 매일 새벽에 일어나서 정미소 앞을 깨끗이 쓸고 물을 뿌리니까 주인 영감님이 그렇게 좋아 할 수가 없었어요.”

정주영은 새벽에 일찍 일어나 가게 앞을 깨끗이 쓸고 정돈했으며, 열심히 배달하고 부지런히 '되질'과 '말질'을 익혔다. 그를 눈여겨본 가게 주인은 정주영에게 장부정리를 맡겼다. 세 번째 가출했을 때 부기학원을 다닌 실력을 발휘하여 그는 재고관리와 고객별 원장 · 분개장을 갖추어 놓았고, 성실과 신용으로 주인은 물론 거래처 고객들을 감동시켰다. 정주영은 검소한 생활을 하면서 받은 급료를 저축했다.
정주영이 복흥상회에서 3년 동안 일하는 사이에 정주영을 눈여겨 본 주인은 여자에 빠져 가산을 탕진한 아들대신 정주영에게 가게를 물려주었다. 정주영은 그동안 쌓은 신용만으로 복흥상회를 인수하여 쌀가게 주인이 되었다. 단골손님을 그대로 물려받았고 정미소로부터 전과 다름없이 월말계산으로 쌀을 공급해 주겠다는 약속도 받았다. 1938년에는 서울 신당동에 가게를 새로 얻어 '경일상회' 라는 간판을 내걸었다. 그때 그의 나이 23세, 고향을 떠나온 지 4년 만의 일이었다.
그는 일반 가정, 음식점뿐만 아니라 서울여상 기숙사와 배화고녀 기숙사에도 계속해서 쌀을 대주며 장사 규모를 키워나갔다. 그의 오랜 막노동과 고용살이에 종지부를 찍고 하나의 독자적인 사업가로 전환할 수 있는 절호의 계기를 마련해 준 셈이 되었던 것이다.
가금현 기자 ggh7000@hanmail.net
가금현 기자 입니다.
긍정적인 사고로 의리를 지키며 살고싶다.
술은 웃음소리가 밖에까지 들리도록 마셔라!
내가 그자리에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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