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회]어버이를 섬기고 집안을 잘 이끌어라

리채윤의 실천하라, 정주영처럼
[22회]어버이를 섬기고 집안을 잘 이끌어라
- 리채윤 도서출판 작가교실 대표
  • 입력 : 2023. 04.17(월) 11:17
  • 가금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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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리채윤 도서출판 작가교실 대표
[리채윤의 신사임당의 자녀교육법/CTN]

백발의 어머님 강릉에 계시는데,
이 몸 서울 향해 홀로 떠나는 마음.
고개 돌려 북평(北坪) 때때로 바라보니,
흰 구름 나는 하늘 아래 저녁 산이 푸르구나.
-신사임당

아, 너무 일찍 세상을 떠난 신사임당

"아…··· 어머니, 이렇게 허무하게 어머니께서 돌아가셨다니." 이때 율곡의 나이는 16살이었다. 율곡은 3년 동안 상복을 벗는 일도 없이 시묘살이를 했다.

오늘날 한국 사회는 일인 가족이 500만을 넘어서는 시대를 맞이했다. 전국 가구의 4분의 1이 혼자 사는 사람들이다. 그들에게 부모와 효도, 형제자매와의 우애는 어떤 의미를 가지는 것일까? 모두들 저 혼자 살기만 바빠서 부모 형제를 거들떠 볼 여유조차 없는 것은 아닐까?
그래도 설날이나 추석 등 명철 때가 되면 전국의 고속도로가 미어터지는 것을 보면 아직 우리에게는 부모 자식 간의 천륜을 저버린 시대라고 한탄하지 않아도 될 것인가?
그래도 요즘 세대들에게 효도(孝道) 운운하면 '노땅'소리 듣기 십상이다. 하지만 율곡의 말대로 "천하의 모든 물건 중에는 내 몸보다 더 소중한 것이 없다. 그런데 이 몸은 부모가 주신 것이다."라는 사실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율곡은 뛰어난 천재인 동시에 효심이 가득한 효자였다.
율곡은 9세가 되던 해에 『이륜행실(二倫行實)』을 읽었다. 중종 때 김안국(金安國)이 경연에서 강의한 내용을 엮은 책인데 그 속에는 당나라 때 장공예(張公藝)라는 사람이 한 집에 9대가 함께 살았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율곡이 이 대목을 읽고 감동을 느껴서 이륜행실도(二倫行實圖)를 그려 어머니 신사임당을 기쁘게 했다,
그 그림은 어린 아이의 그림이라 어설프기는 했지만 모든 형제들과 부모를 받들어 모시고 함께 사는 그림이었다. 이것은 율곡이 어릴 때부터 형제지간의 의리를 소중하게 여긴 도학자적 기풍이 있었음을 깊이 느끼게 하는 대목이다. 훗날 율곡은 황해도 해주 석담에 100명에 가까운 가족을 모아놓고 살면서 어머니와의 약속을 지켰다.
그러나 그 가족 중에 어머니 신사임당은 없었다.
율곡이 15세 되던 해 여름, 아버지 이원수는 드디어 음직(蔭職)으로 수운판관이라는 벼슬을 얻었다. 각 지방에서 나라에 세금으로 바치는 곡식을 배에 실어 한양으로 운반해 오는 일을 감독하는 직책이었다. 아버지 나이 50세에 얻은 첫 벼슬이었다. 신사임당이 그토록 싫어했건만 당숙 이기의 도움이 컸던 모양이다.
어찌됐든 남편이 벼슬에 오르게 되자 살림 형편이 전보다 넉넉해져서 삼청동에 있는 넓은 집으로 옮겨 살게 되었다.
다음해 봄, 이원수는 큰 아들 선과 셋째아들 율곡을 함께 데리고 평안도로 갔다. 아들들에게 북도의 풍물을 보게 하여 견문을 넓혀주려는 생각에서였으리라.
그런데 그것이 어머니 신사임당과의 마지막이 될 줄은 아무도 몰랐다. 신사임당은 남편과 두 자식이 떠난 후 곧 병을 얻어 병석에 누웠다. 자리에 누운 지 3일째 되는 날 새벽, 신사임당은 남아 있는 자식들을 불러서 “내가 이제 다시 일어나지 못할 것 같구나.”라는 말을 남기고 눈을 감았다. 때는 명종(明宗)6년(1551년) 5월 17일, 아직 해가 뜨지 않은 이른 새벽이었고 향년 48세였다.
아버지와 두 아들은 무사히 일을 마친 다음 배를 타고 한양으로 오고 있었다. 일행이 서강나루에 닿았을 때 기다리고 있던 하인이 발을 동동구르며 신사임당이 세상을 버렸다는 소식을 전했다.
율곡은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은 아득함을 느끼며 한동안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어머니의 임종을 지켜보지 못한 것이 율곡을 더욱 아프게 했다.
"아…··· 어머니, 이렇게 허무하게 어머니께서 돌아가셨다니."
이때 율곡의 나이는 16살이었다.
* * *
율곡은 두 형과 함께 3년 동안 어머니의 무덤 옆에 임시로 작은 집을 꾸미고 여묘(廬墓)살이를 했다. 율곡은 3년 동안 상복을 벗는 일도 없고 손수 음식을 받들어 올리며 그릇까지 하인들을 시키지 않고 손수 씻었다. 18살 되던 해 율곡은 3년 시묘살이를 마치자 집으로 돌아와 상투를 틀고 갓을 쓰고 어른이 되는 관례를 올렸다.
그러나 율곡은 여전히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과 죽음에 대한 문제에 사로잡혀 있었다. 극락이니 지옥이니 하는 죽은 뒤의 세계가 어떤 것인지를 알고 싶어 견딜 수가 없었다. 율곡은 고민 끝에 속세를 떠나 절로 들어가 그런 것들을 깨우치고 싶은 충동에서 아버지에게는 고하지도 않고 편지 한 장만 남겨둔 채 금강산으로 들어가 1년 가까이 지내게 된다.
신사임당은 살아생전에 바람기가 농후한 남편에게 자신이 죽더라도 새 장가는 들지 말라고 부탁한 적이 있었는데, 신사임당의 뜻과는 달리 이원수는 곧 후처를 맞았다. 율곡이 집을 떠나 금강산 행을 선택한 이유 중에 하나는 어머니가 돌아가시자마자 아버지가 서모 권씨를 안방마님으로 들어앉힌 때문이기도 했다.
당지 율곡의 큰형인 선은 28세, 큰누나 매창은 23세였다. 게다가 큰형은 미혼이었으므로 이러한 환경 속에 후처와 장성한 자식들 간에 원만하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다. 게다가 서모 권씨는 매우 박덕한 여인으로 술을 좋아했고 성미가 강팔랐다. 편안하던 집 안에 검은 구름이 끼기 시작했다. 우선 큰형이 선과 권씨와 사이가 원만하지 못했다. 두 사람이 하루도 빼 놓지 않고 서로 다퉈 하루도 집안이 편안한 날이 없었다고 한다. 율곡이 집을 나가면서 남긴 편지는 절규 그 자체였다.
“이렇게 언제까지나 화목하게 살아 갈 수 없다면 차라리 죽어버리는 것이 낫겠습니다. 어찌 이대로 살아 갈 수가 있겠습니까?”
성녀같은 어머니 대신 들어온 여인 때문에 율곡이 얼마나 괴로워했는지 그 심경을 알 수 있을 것 같다. 당시에는 시묘살이도 1년이면 마치는데 굳이 3년을 고집한 것도 집안에 있기 괴로웠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가금현 기자 ggh7000@hanmail.net
가금현 기자 입니다.
긍정적인 사고로 의리를 지키며 살고싶다.
술은 웃음소리가 밖에까지 들리도록 마셔라!
내가 그자리에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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