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공부를 하는 이유

리채운의 신사임당의 자녀교육법
[3]공부를 하는 이유
- 리채윤 작가교실 대표
  • 입력 : 2021. 06.14(월) 09:46
  • 가금현 기자
오피니언
기고
칼럼
사설
인사
종교
동정
신년사
송년사
안창현의 칼럼
발행인 칼럼
CTN논단
만물창고
가재산의 삶의 이야기
리채윤의 신사임당의 자녀교육법
문영숙의 꼭 알아야 할 항일독립운동가 최재형
CTN문학관
김영희 교육에세이
박순신의 사진여행
주대호의 물고기 사육정보
리채윤 도서출판 작가교실 대표
[리채윤의 신사임당의 자녀교육법/CTN]
-뜻을 세우고 배워서 성인이 된다

신사임당이 자녀들에게 뜻을 세우고 그 뜻을 실현하도록 독려한 것은 현대성공학이 목표를 설정하고 그 꿈을 이룰 때까지 올인하라고 가르치는 이치와 같다.

사임당은 자녀들에게 뜻을 세우고 뜻을 세웠으면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 반드시 그것을 이루어야 한다고 누누이 가르쳤다.

어린 나이에 당호를 지은 신사임당다운 가르침이 아닐 수 없다.

그러면 뜻을 세운다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

조선시대를 지배한 유가의 경전에 속하는 <논어>에는 '비록 평범한 사람이라도 노력하고 공부하면 성인군자가 될 수 있다'는 사상이 밑바닥에 깔려 있다.

공자는 유교의 시조이기는 하지만 다른 종교의 시조들처럼 신비화되거나 비인간적인 존재로 탈바꿈하지 않았다.

공자는 요임금과 순임금이 유교에서 이상형으로 삼을 만큼 전설적인 성인이라고 해도 그들 역시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라고 가르쳤다.

이렇듯 유교라는 학문이 지니는 가장 큰 주제는 '더 나은 삶'을 사는 것, '성인'이 되는 것이다.

유교 경전에 달통했던 신사임당은 사람노릇을 하기 위해서는 남녀노소를 물문하고 공부를 해야 한다고 믿었다.

누구나 할 수 있고, 마땅히 해야 하는 것이 공부다.

그녀는 모든 인간에게는 저마다의 가능성이 있다고 믿었기에 세 딸에게도 똑같은 공부를 시켰다.

맏아들 선(璿)이 여러 차례 과거에 낙방했을 때에도 벼슬자리에 연연하는 것보다 뜻을 세우는 것이 중요하다고 일렀다.

신사임당의 교육사상은 현대의 자기계발론자나 성공학 강사들의 생각과 흡사한 점이 많다. 신사임당이 자녀들에게 뜻을 세우고 그 뜻을 실현하도록 독려한 것은 현대성공학이 목표를 설정하고 그 꿈을 이룰 때까지 올인하라고 가르치는 이치와 같다. 그

것은 '더 나은 삶'을 추구하는 유교의 이념과 현대 성공학의 이념이 맞아 떨어지기 때문이기도 하다.

만약 당신이 <논어>를 캐캐묵은 경전정도로 생각하고 있다면 <논어>를 한 번 읽어보시라. 논어는 강압적인 교설(敎說)이나 훈계보다는 상상이상으로 현실적이고 현대적인 책이다.

<논어>의 가르침은 '더 나은 삶'을 추구하는데 있고 그것은 현대의 성공학이 추구하는 목표와 같다.

자기계발의 창시자 폴 마이어가 성공적 인생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 가장 강조하는 것은 '목표'이다. 그는 자신의 저서에서 자신이 성취한 일 중 75%는 목표설정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고 말한다.

"목표란 우리가 겨냥해야 할 과녁 정도의 의미가 아니라, 그보다 훨씬 더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계획을 구체화하고 그 달성 시한을 정할 때, 구체화된 그 목표에는 불가사의한 힘이 깃들게 됩니다"

총명하고 현숙했던 신사임당은 공자의 가르침에서 '공부'와 '교육'이라는 목표를 찾아냈고, 그것을 자기 자신과 남편, 그리고 자녀들에게 주입시키고 실천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신사임당은 여성해방론자도 아니었고, 시대의 개혁을 부르짖는 혁명가도 아니었다. 그녀가 살던 시대는 그런 것을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던 시대다.

다만 그녀는 기존의 관습에 개의치 않고, 스스로의 올바른 판단으로 자신만의 독특한 삶을 살았다.

사임당은 딸만 다섯인 집에서 둘째로 태어나 혼인을 한 뒤에도 여러 해 동안 친정에서 살면서 자신만의 예술 세계를 펼쳐 나갔다.

그녀는 결혼을 해서도 새벽에 일어나 글을 읽었다. 바쁜 시간을 쪼개어 틈틈이 글씨를 쓰고, 그림을 그리고 자기계발을 평생토록 한 여류화가로 살았다.

신사임당이 절묘한 자신만의 예술 세계를 펼칠 수 있었던 중요한 동기는 집안환경 덕분이었다.

그녀가 자신만의 뜻을 세우고 남다른 인생을 살아갈 수 있게 만들어 준 사람은 아버지 신명화(申命和)의 현명한 선택 덕분이었다.

아버지는 재주 많은 딸이 결혼을 하고나서도 학문과 예술 활동을 계속할 수 있도록 합당한 사윗감을 일부러 골라서 시집을 보냈던 것이다.

신명화는 학문과 인격이 뛰어난데다 강직한 성품으로 선비들 사이에서도 지조 굳은 인물로 정평이 나 있었다.

그는 연산군 같은 폭군 밑에서는 벼슬을 하지 않겠다는 결심을 굳히고 과거에 응시하지 않다가 늦깎이로 41세에 비로소 과거에 급제했지만 벼슬은 하지 않았다.

영의정 윤은보(尹殷輔)가 벼슬을 적극 권했으나 한사코 사양하고 학문에만 전념했다.

조광조(趙光祖)를 비롯한 신진사류(新進士類)들과 동료로 지냈으나 기묘사화(己卯士禍)가 일어났을 때 벼슬을 하지 않았던 덕분에 화를 면할 수 있었다.

아버지 아버지의 이런 성품은 사임당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

사임당의 일생을 살펴보면 아버지로부터 선비로서의 학식과 강직한 기질을, 어머니로부터 따뜻하고 자애로운 성품을 물려받았음을 알 수 있다.

1522년, 신사임당은 19살 되던 해에 서울 살던 22세의 덕수 이씨(德水李氏) 이원수(李元秀)와 혼인을 한다.

이원수는 명문가의 자제이기는 했으나 여섯 살에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시고 홀어머니 밑에서 자란 탓에 학업에 전념하지 못해서 신사임당보다 배움이 깊지 못했다.

그래서인지 그는 유교 사회의 전형적인 남성들처럼 남성 우위의 허세를 부리는 남편은 아니었다.

오히려 아내의 학문의 깊이와 예술가적 자질을 인정해 주고 아내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사나이였다.

이원수는 신사임당의 그림을 친구들에게 자랑을 할 정도로 아내를 이해하고 또 재능을 인정했다.

이렇게 된 데는 아버지 신명화의 역할이 컸다. 신명화는 사윗감을 고르는 자리에서 이원수에게 이렇게 말했다.

"자네도 알다시피 내게는 딸이 다섯이나 있네. 딸들은 나이가 되면 마땅히 시집을 보내야지. 그런데 다른 딸은 시집을 가도 서운하지 않은데, 둘째만은 재주가 아까워서 내 곁에 두고 싶어"
이 말은 이원수에게 처가살이를 하란 뜻이었다.

신명화는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재주 많은 딸이 혼인을 해서 다른 여성들처럼 평범하게 살도록 만들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여러 가문 중 고른 것이 이원수 집안이었다. 덕수 이씨 집안도 명문이었지만, 시아버지가 없는데다 시어머니 될 홍씨(洪氏) 부인의 성품도 원만해서 사위에게 처가살이를 하라고 단호한 태도를 취했던 것이다.

당시만 해도 신랑이 혼인한 뒤 일정 기간 처가에서 사는 것은 예삿일이었다. 그런데 그해 11월 신명화가 47세로 졸지에 세상을 떠났다.

사임당은 아버지의 삼년상을 치르기 위해 강릉 집에 머물렀고, 이후 이원수는 한양과 강릉을 오가며 살았다.

신부가 시집을 가면 눈멀어 3년이요 귀먹어 3년이요 말 못하여 3년이라 하는데 신사임당에게 그런 일은 없었다.

신사임당은 자신의 능력도 출중했지만 혜안을 지닌 아버지 덕분에 평생을 비교적 자유롭게 자기계발에 매달릴 수 있었고 일곱 아이들을 훌륭하게 키워낼 수 있었던 셈이다.
가금현 기자 ggh7000@hanmail.net
가금현 기자 입니다.
가금현 기자의 다른 기사 보기
오늘의 인기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