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회>자중자애 했던 어머니 이씨 부인

리채운의 신사임당의 자녀교육법
<9회>자중자애 했던 어머니 이씨 부인
-리채윤 도서출판 작가교실 대표
  • 입력 : 2021. 10.26(화) 10:15
  • 가금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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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채윤의 신사임당의 자녀교육법/CTN]무엇보다도 신사임당의 심성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사람은 어머니 이씨 부인이었다. 또한 스승과도 같았던 어머니 신사임당을 너무나도 일찍 잃은 율곡에게 외할머니는 어머니의 빈자리를 채워준 존재였다.

신사임당이 절묘한 경지의 예술 세계를 펼칠 수 있었던 것은 주변 환경이었다. 첫째 그녀의 빼어난 재능을 일찌감치 알아채고 전폭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던 집안 환경, 둘째 유교 사회의 가부장적인 허세를 부리지 않았던 남편을 만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런데 무엇보다도 신사임당의 심성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사람은 어머니 이씨 부인이었다. 이씨 부인은 성품은 천성이 곱고 말은 적고 온화했으나 행동은 민첩했으며 일은 신중하게 처리하는 편이었다.
그녀는 최씨 문중의 교육방침에 따라 학문과 예절을 배우며 자랐다. 이씨 부인은 말은 어눌했으나 마음을 다 할 줄 아는 덕을 지녔다. 그녀는 늘 <삼강행실(三綱行實)>을 암송하면서 자녀들을 가르쳤고 그 아름다운 성품으로 딸 신사임당을 훌륭한 여류 예술가이자 자녀교육에 성공한 어머니로 길러냈다. 신사임당은 풍부하고 섬세한 감정을 지녔지만 신중한 성격의 소유자였던 어머니를 닮아 사리를 분별하는 능력 또한 탁월했다.
이씨 부인의 일생은 율곡이 용인 이씨 대동보에 기록한 <이씨감천기(李氏感天記)>를 보면 사임당이 어머니의 성품을 많이 닮았음을 알 수 있다.

타고난 자질이 순수하고 맑았으며, 행동거지가 침착하고 조용하셨다. 말을 앞세우지 않고 행하는데 민첩하였으며, 일에는 신중을 기하였지만 선한 일을 하는 데는 과단성이 있었다. 약간 학문을 알아 <삼강행실>을 구송하였으며 문장으로써 학문을 삼지 않았다.
율곡 이이, 「이씨감천기」

이씨 부인은 신명화에게 시집가서는 시부모가 계시는 한성으로 가서 시부모를 모셨다. 그러나 친정어머니 최씨가 병환을 앓게 되자 외동딸인 이씨는 모친을 간호하기 위하여 강릉으로 돌아왔다. 어느 정도 치정어머니의 병이 차도가 있자 남편 신명화가 함께 서울로 가자고하자 이씨가 울면서 말했다.
“여자는 삼종(三從)의 도(道)가 있으니 당신의 말씀을 따르지 않을 수 없으나, 저의 부모는 모두 노쇠하시고 저는 외동딸인데 제가 없으면 부모는 누구에게 의탁합니까? 제가 애통해 우는 것은 그 때문입니다. 한마디 부탁을 드린다면 당신은 서울로 가시고, 저는 시골에 남아 각각 늙은 부모님을 모시는 것은 어떠하겠습니까?”
그러자 신명화도 감동하여 눈물을 흘리며 아내의 말을 따르기로 했다. 그 후 신명화는 16년 동안이나 한양과 강릉을 오가며 살았고 이시 부인은 남편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 계속 친정에 머물러 있었다.
어머니 사임당과 마찬가지로 외가인 오죽헌에서 나고 자란 율곡은 외할머니에 대한 정이 남달랐다. 외할머니는 율곡의 생애에 있어서 어머니 신사임당만큼이나 큰 영향을 미친다. 어머니 사임당은 율곡의 나이 16세에 세상을 떠났는데, 외할머니 이씨 부인은 딸 사임당보다도 18년을 더 오래 살아 90세까지 장수하면서 율곡의 성장과 인격 형성에 큰 영향을 끼친다.
율곡은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후 3년 시묘살이를 마치고 계속되는 슬픔을 이기지 못했다. 그는 금강산에 있는 절로 들어가 1년 정도 머문다. 불교의 세계에서도 답을 얻지 못한 율곡은 하산을 하는데, 한양집이 아니라 오죽헌 외할머니 댁으로 가서 그 유명한 <자경문(自警文)>을 짓고 자신의 잘못을 반성하고 마음을 가다듬었다.
말하자면 외할머니는 스승과도 같았던 어머니 신사임당을 너무나도 일찍 잃은 율곡에게 어머니의 빈자리를 채워준 존재였다. 다시 율곡의 글을 보자.

외조모는 올해 나이가 아흔으로 사실 날이 멀지 않았고 병이 몸에서 떠나지 않아 오랫동안 병석에 계셨습니다. 몸은 벼슬에 매여 있어 찾아가 뵈올 길이 없었고, 하루아침에 갑자기 운명하신다면 지울 수 없는 아픔이 될까 매우 두려웠습니다. 그래서 병환을 이유로 (무진년에)벼슬을 그만두고 급히 강릉으로 돌아와 간병하며 약 시중을 들게 되었습니다. 외조모님은 거동이 사람의 도움을 필요로 하고 기력을 근근이 부지하고 계십니다. 갑자기 타계하시어 다시 회생하지 못할까 염려스러워 차마 곁을 떠나지 못하고 아직도 서울로 돌아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사교리잉진정소(辭校理仍陳情疏)」

그 해 11월에 율곡은 이조좌랑이라는 대단한 벼슬을 헌신짝처럼 내팽개쳐 버리고 외조모 병구완을 하겠다고 강릉으로 달려간다. 하지만 워낙 연로하신 외할머니는 돌아가시고 만다. 율곡은 외할머니의 영전에 이런 애끓는 제문을 올린다.

어버이 뫼시지 못한 슬픔 속에
오직 할머님 한 분 받들어
자나깨나 마음속에 계시옵더니
이제 또한 저마저 버리시옵나이까

율곡이 외할머니께 품었던 정이 마디마디에 넘쳐 있다. 율곡과 외할머니의 특별한 유대는 이씨 부인이 남긴 <분재기(分財記)>에서도 확인된다. 서울 수진방에 있는 기와집 한 채와 노비 및 전답을 율곡에게 상속했다.
가금현 기자 ggh7000@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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